수원교구 요당리성지
 




   
  65호(2012년 4월): 이별에 슬퍼할 수 있겠지만 살아있음에 희망을 갖는 우리가 되자
  글쓴이 : 요당리성지     날짜 : 12-04-02 11:15     조회 : 1068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우리 주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들 모두에게 주님 부활의 기쁨을 전해 드리며, 주님 안에서 걸어가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이 언제나 영생의 기쁨과 희망을 노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언젠가 성지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신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늘에 의탁하고, 의존하는 마음이 더욱더 커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농사짓는 사람보다 다른 일에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하늘의 고마움을, 하늘에 의탁해야 됨을 많이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의 말씀처럼 언제부터인가 우리 생활이 하늘을 바라보고 그곳에 의탁하기 보다는 우리의 이성과, 그 이성이 만들어 낸 산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 이성적인 판단에 더 큰 삶의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그 이성도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다면 내 삶의 시선이 항상 하늘을 향해야 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부활의 신앙 역시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만 겸손한 농부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진리일 것입니다.
           

1. 이별에 슬퍼할 수 있겠지만 살아있음에 희망을 갖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저는 장례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항상 유족들에게 들려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별에 슬퍼할 수 있겠지만 살아있음에 희망을 갖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유족들에게 확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는 부활의 삶이 지금 여러분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생명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앞에 누워있는 고인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던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그 숨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숨을 거두어 가시는 그 순간은 절망이 아니라,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나아가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즉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초대받아 가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당장은 고인과의 이별에 슬퍼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 같이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부활하여 만날 것을 희망하며 고인이 가시는 길을 기쁨으로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보게 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슬퍼하고 절망하는 죽음을 단지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아이 때문에 울며 가슴을 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아이의 영이 되돌아와서 아이가 즉시 일어섰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아이의 부모는 몹시 놀랐다”(루카 9,52-56).
 
  이밖에도 주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던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고(요한 11,38-44), 나인이라는 동네에서는 과부를 불쌍히 여겨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기도 하셨습니다(루카 7,11-17).
 
  이렇듯이 우리의 죽음은 사람에 따라 시간의 선후를 달리할 뿐 언젠가는 맞이해야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죽어있는 우리의 생명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을 두렵고, 슬픈 일이 아니라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기쁨과 희망의 전주곡으로 바라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자녀를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부부를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두 분 모두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자녀를 데려간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두 분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그래서 두 분에게 드린 말씀도 “이별에 슬퍼할 수 있겠지만 살아있음에 희망을 갖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분에게 “아드님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에 대한 슬픔은 오늘까지만 하십시오. 그리고 내일부터는 아드님과 다시 만날 그날을 희망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보다 더 기쁘게 살아나가십시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요즈음,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분에게 국한된 기쁨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의 부활을 기뻐하는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죽어야 된다는 삶의 절망이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살아난다는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2. 우리는 영원의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각이 세상의 지평에만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작년에 장주기 요셉 성인의 후손되시는 분들이 와서 성지에 소나무 한주를 식목하였습니다. 그리고 식목행사가 끝난 다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사자리에는 식목 때문에 왔었던 농원의 사장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예의상으로 그분에게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75세입니다.” 이 말에 저는 깜짝 놀라 “저는 사장님을 50대 후반으로 뵙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사장님처럼 젊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잠시 주저하시다가 곧이어 당신의 건강비결이 기수련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혹시 ‘대순진리회나 단학수련’에 속한 분이시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 하시는 말씀이 전에는 그곳에 관심을 가졌으나 지금은 독자적으로 수련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분하고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생각하시고 계시는 부활은 우리가 믿고 있는 부활과는 달랐습니다. 즉 이분이 생각하고 계시는 부활은 식물이 씨앗을 퍼뜨리고 자신은 죽듯이, 즉 그 씨앗이 생명을 발화하여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가듯이 인간의 부활이라는 것도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신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부활에 대한 교리는 ‘무속적인 경향과 비슷하여 사람의 마음을 교란시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제가 이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린 이유는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아니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믿고 있는 분들조차 이분처럼 이 세상의 지평에서 부활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영원의 가치에 투신하지 못하고 유한한 이 세상의 가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례를 오신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가끔 드립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즉 단순히 우리의 신심을 수양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만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그대신 우리의 종교는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믿고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저 영생의 가치를 지향하며 지금 현재의 우리 삶에서부터 그 가치를 실천하고 열매 맺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표하는 가르침으로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38-48)’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몸소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고자 십자가상 수난과 고통 앞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삶의 발걸음을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발걸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일전에도 사기를 당해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신자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같은 믿음 안에 사시던 분에게 그런 일을 당하셨기에 저도 그분과 상담하는 내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지만 이분에게도 끝내 말씀드린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이분에게 권고해드린 것도 이 세상의 지평이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며 삶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있는 영원의 지평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 계획 속에서 당신의 영원함에 머무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영광스러운 그 은총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당신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원래의 창조계획에로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시각이 계속해서 세상의 지평에만 머물러만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오늘의 발걸음은 내일의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그 생명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교적상 신자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저희 성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성지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