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요당리성지
 




   
  58호(2011년 9월): 지금 내 손에는 어떤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가?
  글쓴이 : 요당리성지     날짜 : 11-08-30 13:37     조회 : 980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일전에 성지근처에서 수박농사를 하고 계시는 요당리 구역장님께서 올해 수확한 수박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많은 투자를 하셨고, 매년 그래왔듯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셨지만 올 여름 내내 내린 잦은 비로 많은 손실을 입으셨습니다. 마음이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성지와 이웃하고 있는 다른 농사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구역장님도 그러하시고, 이웃하고 있는 많은 분들도 새로운 마음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밭을 정리하고 다른 모종을 심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어떤 때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그 결과를 바라보며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황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하느님 안에서 내게 주어진 은총의 시간들을 다시 열매 맺기 위해 일어서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분명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풍성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요번달 회지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또 저에게 외쳐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파이팅.”   
 

1. 지금 내 손에는 어떤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가?

  어느 신부님께서 ‘내 손에 쥔 열쇠’라는 화두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로에는 수많은 문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여정에서 만나는 문들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다. 그리고 끝내는 마지막 문인 죽음의 문마저도 자신이 가진 열쇠로 열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내 손에 어떤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가?”
  일전에 볼일을 보러 인근지역을 갔다가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잘 아는 신자분이 새롭게 가게를 오픈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무당을 불러 동네가 떠나가도록 굿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 신자분은 제가 모 본당에 있었을 때 냉담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본당에 있으면서 냉담을 풀었고, 제가 본당을 떠났어도 볼 일을 보러 인근지역을 나가면 “안녕하세요 신부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반갑게 인사하며 뵐 수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던 이분이 언젠가는 지나갈 세상적인 안위만을 바라보며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니 정말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때마침 그분이 몇몇 분들하고 가게 앞에서 크게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성지로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열심히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는 자매님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갑게도 그분이 유모차에 갓난아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그때 그 아이인가요?” “아닙니다. 신부님. 이 아이는 둘째 외손주입니다.” “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의 어머니, 따님은 냉담을 풀고 성당에 나가고 있습니까?” “아니오, 아직도 냉담 중에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열심했는데 제가 못난 어미이지요.” 그런데 때마침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아이의 어머니, 즉 냉담중에 있는 따님이 다가왔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이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첫째 아이도 그렇고, 여기 있는 둘째 아이를 위해서도 이제는 성당에 나가셔야죠.” “신부님, 저 성당에 안 나가요?” “아니 왜요?” “결혼할 당시 간신히 남편을 설득해서 예비자 반에 등록시켰는데 기도문을 못 외웠다는 이유로 탈락시키다니요. 저는 그때의 그 상처 생각하면 다시는 성당 안 나가요. 그리고 성당 안 나가도 세상 살아나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하느님을 아는 분이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 삶에 안주만 하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시 마음을 잡고 성당에 나가세요.” 그런데 그분은 저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 이상 대꾸도 안한 채 집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파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인생의 문을 여는 참된 열쇠를 우리 손에 지니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결과는 확연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안다고는 말하면서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안위에 급급하여 우리 손에 지녀야 될 참된 천상의 열쇠를 저버리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소개해 드린대로 한분은 무당을 불러서라도 풍요로운 삶의 내일이라는 열쇠를 또 한분은 무사안위라는 삶의 열쇠를 내 손에 꼭 쥐고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의 여정을, 아니 당신께 나아가는 천상의 여정을 열어가는 참된 열쇠일까요?
  “끝내는 마지막 문인 죽음의 문마저도 자신이 가진 열쇠로 열게 된다”라는 앞서 소개해드린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 인생의 끝자락에 내가 가진 열쇠를 통해 열어본 세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아마도 기쁨과 슬픔이 교차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5,30). 그렇다면 주님의 이 말씀을 되새기며 지금 내 손에 쥐고 있어야 될 열쇠는 무엇일까요?
 

2. 우리 신앙의 핵심은 내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고,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아는데서 부터 출발한다. 주님을 아는 지식만이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고백하자.

  일전에 신자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요즘 거울을 바라보면서 가끔마다 되뇌입니다. ‘전에는 그래도 괜찮았었는데. 지금은 잔주름에, 피부는 윤기 없이 푸석푸석하고, 그리고 왜 이렇게도 흰머리는 많아졌는지’ 그리고 세안 후에는 목욕탕 세면대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아유 아까워’라는 말을 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많은 신자 분들이 웃으셨습니다. 아마도 사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의외여서 그런 반응을 보이신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의 이야기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뒤이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나가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즉 나의 젊음과 패기를 자랑하며 살아갈 때가 있는 반면에 우리에게 닥칠 이 세상의 끝자락, 즉 죽음을 늘 생각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이란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즉 내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이제는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 그분 안에서 복된 영생의 삶을 시작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 일상의 다짐이 ‘언제나 당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내 삶의 발걸음을 올바르고 선하고 진실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돈 많이 벌어서 얼마 남지 않은 이 생, 행복하게 마음껏 즐기고 먹고 누리다가 가야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어떤 분과 전화통화하면서 “돈이 원수입니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즉 갑작스럽게 생긴 엄청난 돈 앞에서 이 자매님의 배우자분이 “내 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이제부터는 즐기며 살거야”라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고, 그렇게 우애 있게 지내던 자녀들마저도 이 세상의 행복이라는 명분하에 그 놈의 돈 앞에서 서로가 반목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행복한 삶, 즐기는 삶, 여유 있는 삶일까요? 그렇다면 다시한번 주님의 이 말씀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5-26).                   
  일전에 어떤 자매님이 성지에 찾아오셨습니다. 이분이 저에게 오셔서 한 질문은 “돌아오는 추석에 저에게 잘못하고 실망을 안겨준 형제들을 만나야 하는 걸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자매님에게는 친정어머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에게 시한부 삶이 선고되었고 그래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해야 된다’라는 생각으로 요양원에 모시자라는 형제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남편과 함께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형제들이 “너만 잘났냐?”라며 자신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난에도 자매님은 요양원에 모시자라는 자신들의 의견이 무시되어서 속상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며 침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지나 끝내는 어머니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 장례를 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형제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유산을 빼돌렸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을 그렇게 비난하고 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속상했다고 합니다. “그 놈의 돈이 뭐길래. 그리고 삶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도 형제들의 처지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래서 제가 자매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속상하지만 하느님을 모르고 현세만을 바라본 형제들의 어리석음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석에 형제들을 만나십시오.” “예, 신부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알고 있고, 그분께 의탁하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다가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 스스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의 기준은 내게 펼쳐진 인생의 여정 안에서 내 손에 천상의 열쇠를 쥐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가는 현세에 집착하지 말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내게 주어진 삶을 올바르게 살아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내는 그 믿음의 열쇠를 가지고 죽음의 문을 활짝 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1-2).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교적상 신자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저희 성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성지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