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요당리성지
 




   
  56호(2011년 6월): 사람은 누구나가 다 부끄럽게 산다
  글쓴이 : 요당리성지     날짜 : 11-05-31 14:15     조회 : 817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작년보다는 5월 성수기 순례철의 순례객 방문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서울과 인천, 의정부 교구의 많은 본당에서 저희 성지를 방문해 주셔서 순례철답게 정신없이 보낸 한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순례철의 성수기를 15일정도 남겨놓은 시점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항상 부족한 이 사제와 성지를 기억해주신다는 생각을 가지며 주님 안에서 다시한번 파이팅 해 봅니다. 여러분들도 저처럼 생활중에 많이 지치고 힘들어할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 파이팅 하시길 기도중에 기억하겠습니다. 더욱더 영육간에 건강하십시오.     


1. 사람은 누구나가 다 부끄럽게 산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마음으로 느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진다.
 
  일전에 모교회의 목사님들이 교회내의 이권 다툼 끝에 상대방을 폭행치사 혐의로 경찰에 고소,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목사님들 간의 폭행과 고소라는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실상은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당했다”라는 주장만 있지 서로의 자책이나 반성이 없다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지켜본 경찰관계자의 한마디가 종파는 다르지만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때리지 않았다는 것을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라고 서로가 주장하니 이 사건의 증인으로 하느님을 소환 요청해야 되나?”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부끄럽게 산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마음으로 느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진다.” 그렇습니다. 이분의 말씀처럼 사람은 누구나가 다 부끄럽게 삽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신자분들에게 ‘저의 잘못 때문에 과연 주님의 사제로서 하느님과 신자들 앞에 설 자격이 있는가?’라는 자책어린 말씀을 드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런 저의 자책과 성찰속에서 언제나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체험은 부족하지만 당신의 사제직에 늘 있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라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제가 저의 잘못을 인식하지도, 또한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제 잘난 맛에 살아만 간다면 저는 지금 하느님 앞에, 그리고 많은 교우들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겠습니까?
  “나는 주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겸손되이 주님의 사도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사도 바오로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분명 이분도 과거 자신의 행적이 늘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의 걸림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분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도 바오로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신앙의 신비”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이분에게 평생의 낙인처럼 따라다녔던 죄인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때마다 겸손되이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가 아닌 바오로교가 존재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듯이 진리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봉헌드려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을 받아주시고 새로운 삶의 발걸음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겸손되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삶을 걸어나가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분명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은 달라질 것입니다.


2. 신앙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전에 어떤 자매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이유는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성지에 가 보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이분은 모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본당행사 문제로 함께 봉사하던 자매님과 이견이 생겼고, 끝내는 고성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고, 그 이후 성당에 나가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6개월을 냉담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매님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꿈에 하느님께서 이곳 성지에 가라고 한 이유를 자매님이 자매님의 눈으로 오늘 제대로 보고 가시지 않으면 그리고 내 눈으로 본 것을 내 영혼 안에 각인시키고 가시지 않으면 아마도 이것은 일회성 행사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또다시 꿈에 나타나지 않는 한 자매님은 지금의 모습처럼 냉담한 상태로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곳 성지에서 자매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순교자들이 열매 맺었던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자매님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 당장 자매님이 용기를 내어 본당에 나갔을 때 부딪쳐야 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매님이 오늘 보신 것을 절대로 잊지 않고 참 생명의 길을 열매맺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면 자매님은 분명 하느님의 훌륭한 구원의 도구로, 봉사자로 거듭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보는 것입니다. 내가 걸어가야 될 참 생명의 길을.” “신앙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보았고, 그래서 용기를 내어 걸었던 주님의 은총의 길을, 구원의 길을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믿음의 여정에서 겪을 수 있는 역경들을 주님 안에서 용기있게 헤쳐나갈 수 있어야 되고, 그 믿음의 여정중에 나타날 수 있을 우리의 나약함, 부족함을 늘 주님 안에서 성찰하며 겸손되이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참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 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갔다.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을 따라 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간 두 사람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1,35-41). 우리가 신앙 안에서 보아야 될 것은 나를 이 세상에 사랑으로 존재케 해주시고, 언젠가는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해 주실 생명의 주님 그 자체이십니다. 내 삶의 근본인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 삶의 발걸음을 천상을 향한 발걸음으로 늘 향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3.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현재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인이 되자

  일전에 순례를 오셨던 할머니 한분이 갑자기 저의 손을 붙잡으시면서 “집에 가기 싫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저에게 할머니께서 지금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원래 할머니는 자녀들과는 독립적으로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정책에 따라 할머니가 사시던 집으로 도로가 나면서 어쩔 수 없이 아들 내외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셨고 자연스럽게 집 수용에 대한 국가와의 행정처리를 아들 내외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행정처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무렵, 보상금으로 나온 1억 6천만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아들 내외에게 물어보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갑자기 아들 내외가 역정을 내며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이야기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랐고, 가슴으로부터 분노가 치밀어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 내외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그래서 할머니가 생각 끝에 내린 것이 1억 6천을 받지 못한다면 아들 내외로부터 매달 용돈을 얼마씩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할머니의 생각도 결국 아들 내외의 냉정한 태도로 거부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좌절감과 분노는 더욱더 극에 달했고, 이제는 아들 내외와 얼굴을 맞대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겹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지금 할머니의 문제를 가장 쉽고도 빨리 해결하는 것은 할머니의 돈을 강탈한 아들 내외를 법정에 고소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가 노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패륜 문제에 대해서는 신속하고도 엄정하게 판결을 하고 있고, 대부분 부모님들의 손을 들어주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할머니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마도 못하실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할머니의 모습은 하느님께서도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대신 하느님께서는 할머니에게 잘못한 아들 내외이지만 당신이 탕자의 비유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대로 그 아들의 잘못을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껴안아 주시기를 바라실 겁니다. 힘드시겠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할머니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러자 이 부족한 사제의 말을 들으시고 할머니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 신부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 부족한 자녀들을 껴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의 모습처럼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에서 나도 당신과 같이, 똑같은 모습이라는 복수의 칼날을 내 영혼속에서 꺼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요, 또한 그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가치는 주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에, 그분이 뜻하시는 자리에, 그분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자리에 서 있을 때 비로서 그 가치가 증명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게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사업을 하나둘 마치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그 기쁨의 탄성이 온 우주를 뒤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대하시고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은 현재에도 한결 같으십니다. 즉 언제나 우리가 창조 때의 그 모습처럼 보시니 좋은 모습으로, 보시니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길 원하십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 삶의 부끄러운 발걸음을 되돌려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교적상 신자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저희 성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성지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