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요당리성지
 




   
  52호(2011년 3월): 나는 착한 사람인가?
  글쓴이 : 요당리성지     날짜 : 11-03-01 09:42     조회 : 1093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최근에 수원교구의 보좌주교님으로 서임되신 이성효(리노) 주교님이 서임 인터뷰중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던져라. 던져라. 왜 하느님께 네 자신을 던지지 못하는가?” 저는 이 말씀을 접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망설이고 주저하고 갈등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던지는 삶, 투신의 삶. 그래서 평일 미사 강론 중에도 이 말씀을 바탕으로 ‘진짜 자유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내가 싫다 하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에 투신하는 것이 자유다’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제가 걸어가야 되고, 신자분들이 걸어가야 될 삶을 묵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될 일을 알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망설이고 갈등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참된 행복과 기쁨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분께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나는 착한 사람인가?
  지난 2월 첫째 주 월요일에 수원 북수동 성당 순교 성지에서 신부님들 영성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희 사제들에게 제시된 주제는 마태복음 5,17-31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제시된 이 말씀 중에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라는 말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25-37)의 모습을 떠올리며 ‘의로움’이란 말마디를 ‘착한 사람’이라는 공식으로 대입하여 묵상을 하였습니다. 즉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나는 착한 사람인가?’ 제 묵상의 결론이 어디에 도달했겠습니까? 저는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 앞에서 제 묵상을 소개해드리면서 “저는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많아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이 많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될 일을 더 좋은 방법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고민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 일을 하게 되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오는가? 혹시나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나에게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이제부터라도 의로운 사람으로서 착한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 언제나 설 수 있도록 저의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이 부끄러운 모습에 비추어서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에게도 감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의로운 사람입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작년에 모방송 프로그램에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진 한장’이라는 주제로 버스 운전기사 김길수(56)씨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트위터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며 감동을 준 사진이 있다. 한 버스 운전기사가 할머니를 업고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어부바 버스 기사’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몸이 불편한 노약자를 돕는 당연한 행동이 왜 이렇게 이슈가 된 것일까? 이 질문에 시내버스 기사들은 ‘짐은 들어드릴 수 있지만 직접 업어서 도와드리는 일은 드물다. 천명 기사 중 한명 나올까 말까 한 행동이다’고 말했다. 힘들게 찾은 사진 속 주인공 김길수씨는 ‘할머니가 다리가 불편해 못 내리시기에 업어서 내려드렸다’며 ‘큰 일한 것도 아닌데’라고 수줍게 말했다. 김길수씨의 아내 유금님씨는 ‘부모가 있으니 한 것이니 그렇게 큰 일 안한 것 같은데’라며 ‘남편이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전했다. 김길수씨는 ‘할머니를 내려드린 이유는 우리 엄마처럼 다리가 불편해 못 내리고 있어 업어 드린 것뿐이다. 이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은 잘 모르겠다’고 겸손한 마음을 털어놨다. 방송 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복잡한 차도에 버스를 세워 놓고 친절하고 싶어도 ‘어부바 기사’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기사님에게 ‘어부바’의 친절을 바라는 것 보다 우리 승객들이 ‘어부바 승객’이 됨이 어떨까? 내가 먼저 ‘어부바’ 하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시청 소감이 올라왔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가 먼저 ‘어부바’하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은 남이 아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됨을 잊지 않을 때 더 이상 착한 행동이 감동이 아닌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면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2. 내가 있어 다른 사람이 행복한가? 나의 집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집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어야 한다
  구정 연휴 때 모방송에서 ‘세시봉콘서트’라는 제목으로 70년대, 80년대 초반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씨의 미니콘서트가 방영되었습니다.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가수들이라 이날만큼은 저도 밤늦게까지 시청하였고, 그 감동의 소리를 기억하며 행복하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콘서트를 바라보며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신들과 함께 동시대에 살고 있어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 말마디는 콘서트를 시청하였을 때의 감동만큼이나 저의 영혼을 울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마디에 비추어서 한번 반문해보았습니다. “내가 있어 다른 사람이 행복한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해야 됩니까?” 라는 질문에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데서부터 행복한 사회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1초, 2초, 3초, 이 3초의 여유를 행복으로 바꾸십시오. 즉 차를 몰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었습니다. 화가 나서 당장 욕이 나올 것 같았지만 1초, 2초, 3초만 참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분명 저 사람이 지금 급한 일이 있는가보네’ 아마도 여러분은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의 말씀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의 여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도 일전에 “나의 집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집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어야 한다”라는 화두로 강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소개해드린 것이 모본당 신부님이 사목에서 겪었던 소중한 경험담이었습니다. 그것을 소개해드리자면 어느 날 어떤 형제님이 이 신부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찾아온 이유는 ‘외적인 풍요로움에도 세상 살아가는 의미를 도대체 모르겠고 그래서 그것을 신앙 안에서 찾으려 했지만 도대체가 찾을 수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한참을 생각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과제를 드립니다. 오늘부터 선행일기라는 것을 만들어서 작성하십시오. 즉 하루에 한가지씩 작은 것이라도 선한 일을, 착한 일을 누구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적고 실천하십시오.” 그때부터 이 형제님이 신부님의 말씀대로 실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실천 첫날에는 ‘직장에서 업무에 지친 동료를 돕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전에는 내 일만하면 됐지 다른 이의 어려움에는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목표로 삼은 첫날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발견하고, 자신의 일처럼 그를 도와 업무를 종결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선행일기에 적고 그날의 마음을 이렇게 적으셨다고 합니다.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목표를 ‘나와 아이들을 위해 고생하는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하루가 되자’라고 정하고는 그 다음 날 피곤했지만 일찍 일어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아침밥상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때 퇴근해서는 집안일을 함께 도우고, 아내와 집근처를 산책하며 아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쓰셨다고 합니다. “행복이 가까이 있었는데 멀리서 행복을 찾아다녔다.” 일주일 뒤에 이분이 신부님을 찾아왔는데 너무나 표정이 밝아 당신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창조목적, 그 본질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가 10,27)는 주님의 말씀처럼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있어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행복만을 위해 내 집을 철옹성처럼 짓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집을 짓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과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역설적으로 우리 창조 본연의 본 목적을 추구하는 것으로써 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성취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소개해드린 신부님의 말씀처럼 선한 일을, 착한 일을 매순간 구체적으로 찾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3. 다른 이의 잘못에 대해서는 크게 분개하면서도 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왜 분개하지도 싸우려 하지도 않는 것인가?
  어떤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상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이의 잘못에 대해서는 크게 분개하면서도 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분개하지도 싸우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매순간 우리는 하느님 앞에 당신의 창조목적대로 순결하고, 선하고, 착한 모습으로 서 있기 위해 노력해야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29-30.37).
  그렇습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듯이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퍼센트의 고운 마음씨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안에 심어 주신 순결함을, 선함을, 착함을 언제나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교적상 신자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저희 성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성지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