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장주기 요셉
성인
장주기 요셉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갈매못에서 위주치명(爲主致命)한 성인
1803-1866
요당리(양간) 출신 평신도 회장으로 배론 신학교를 섬기다
병인박해 때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수원의 양간(현재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출신으로서 성인이 되신 유일한 분이다.
1827년경 고향인 양간에서 세례를 받고 1836년 양지의 회장을 역임했으나, 주된 활동은 1843년부터 1866년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정착하여 활동한 제천의 배론(舟論, 현재의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에서 푸르티에(朴) 신부와 프티니콜라(申) 신부를 도와서 신학교 한문교사 겸 선교사들의 집주인 역할을 한 것이다.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고마 수영(水營 : 대전교구 갈매못성지)에서 다블뤼 주교 등 4명과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1. 수원 땅에서 태어나다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은 1803년에 수원 느지개(현재 경기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또는 수원 담안(현재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형편이 괜찮은 중간층이었으며, 장주기는 농사를 지으면서 한문 공부를 얼마간 했다. 그는 신자들 사이에서 ‘장낙소’라고 불렸다.
2. 천주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다

정주기 성인은 친척 김 바르바라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26세 때에 중병에 걸리자 양지(현재 경기 용인 지역)에서 최용년에게 대세를 받았다.
나중에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에게 보례를 받았다.
3.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에 정착하다

장주기 성인은 신심과 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치명할 때까지 그 직책에 헌신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살다가 1845년부터 제천 배론(현재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정착했다.
4. 배론 신학교의 운영을 돕고,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다

1855년에 당시 대목구장 대리였던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성요셉신학교를 설립하자 장주기 회장은 자신의 집을 제공하고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그 후 1856년 입국한 베르뇌 주교가 푸르티에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하자 푸르티에 신부를 도와 신학교 집주인으로서 신학교 운영을 뒷바라지하며 배론 회장으로 활동했다.
5. 배론에 들이닥친 군난의 불길

[ 푸르티에 신부의 요청으로 풀려나다 ]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3월 2일에 포졸들이 배론 신학교에도 들이닥쳐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했다.
이때 장주기 회장도 같이 잡혔으나 푸르티에 신부의 간청으로 포졸들은 그를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음날 신부들이 관아로 이송될 때 장주기도 함께 끌려가자 이를 본 푸르티에 신부가 항의했고, 포졸들은 장주기를 풀어주었다.
6. 다시 붙잡혀 제천 관아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다불길

배론 마을은 포졸들의 약탈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며칠 후에 장주기 회장은 이웃 노블린너굴(현재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서 다시 포졸들에게 잡혀 제천읍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이 선교사의 집주인이라고 말한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7. “크신 임금이요 크신 아버지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 신앙의 증거와 사형 판결 ]
서울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교할 까닭이 전혀 없으니 어서 처분해 달라고 하면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결국 장주기 성인은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음으로써 평생 소원인 ‘위주치명(爲主致命,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침)’는 이루게 되었다.
8-1. 갈매못에서 64세의 나이로 치명의 꽃을 피우다

정주기 성인은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와 함께 보령 갈매못(현재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1866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에 칼을 받아 치명했다.
8-2. 갈매못에서 64세의 나이로 치명의 꽃을 피우다

장주기 성인은 치명 직전에 좌우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렇게 죽음이 성교(聖敎, 거룩한 천주교회)에 광영(光榮)이라” 라고 말했다.
9. 시대의 아픔 속에서 세상을 떠돌던 유해가 안식을 취하다

동료 치명자들과 함께 장주기 성인의 유해는 그해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었으며, 1882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져 보관되었다.
그 후 1894년 5월에 조선천주교회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귀환했으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었다.
장주기 성인 유해는 1900년 11월에 명동성당 지하묘역으로 옮겨졌다가 1967년부터는 절두산성지로 옮겨져 현재까지 안식을 취하고 있다.
10. 장주기 성인의 가족 치명자들

장주기 성인의 가족 중 장 토마스 복자, 장경연, 장치선과 그 가족, 장한서 베드로와 홍씨 부부, 방씨, 방 프란치스카, 장사전은
군난 중에 온갖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 위주치명했다.
11. 우리도 장주기 성인과 그 가족을 본받고자…

[ 현양 성지 ]
장주기 성인이 신학교 집주인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던 배론성지, 신앙을 증거하고 목숨을 바친 갈매못성지, 신자들의 노력으로 유해가 이장되었던 서짓골성지에서
장주기 성인을 현양하고 있다. 또한 장주기의 육촌인 장 토마스 복자가 순교한 청주 장대터(음성 북문 밖)에도 순교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2-1.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 요당리성지 ]
장주기 성인과 가족들의 고향인 요당리성지에서는 성인과 그 가족들의 삶과 신앙, 순교를 기리고 있으며 오늘도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12-2.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요당리성지에는 장주기 성인을 비롯하여 그 가족 순교자들과 양간 지역 출신 순교자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12-3.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요당리성지에는 장주기 성인을 비롯하여 그 가족 순교자들과 양간 지역 출신 순교자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좌)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 (중앙)확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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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배우고 몸에 익힌 것은
대군대부1)의 성교2)이니,
형장 아래 만 번 죽더라도
만 번 하느님을 배척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장주기 성인의 신앙 증거, 포도청 심문에서
1)대군대부(大君大父) : 크신 임금이요 크신 아버지이신 하느님
2) 성교(聖敎) : 거룩한 천주교회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갈매못에서 위주치명(爲主致命)한 성인

1803-1866
요당리(양간) 출신 평신도 회장으로
배론 신학교를 섬기다
병인박해 때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수원의 양간(현재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출신으로서 성인이 되신 유일한 분이다.
1827년경 고향인 양간에서 세례를 받고 1836년 양지의 회장을 역임했으나, 주된 활동은 1843년부터 1866년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정착하여 활동한 제천의 배론(舟論, 현재의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에서 푸르티에(朴) 신부와 프티니콜라(申) 신부를 도와서 신학교 한문교사 겸 선교사들의 집주인 역할을 한 것이다.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고마 수영(水營 : 대전교구 갈매못성지)에서 다블뤼 주교 등 4명과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1. 수원 땅에서 태어나다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은 1803년에 수원 느지개(현재 경기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또는 수원 담안(현재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형편이 괜찮은 중간층이었으며, 장주기는 농사를 지으면서 한문 공부를 얼마간 했다. 그는 신자들 사이에서 ‘장낙소’라고 불렸다.
2. 천주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다

정주기 성인은 친척 김 바르바라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26세 때에 중병에 걸리자 양지(현재 경기 용인 지역)에서 최용년에게 대세를 받았다.
나중에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에게 보례를 받았다.
3.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에 정착하다

장주기 성인은 신심과 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치명할 때까지 그 직책에 헌신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살다가 1845년부터 제천 배론(현재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정착했다.
4. 배론 신학교의 운영을 돕고,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다

1855년에 당시 대목구장 대리였던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성요셉신학교를 설립하자 장주기 회장은 자신의 집을 제공하고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그 후 1856년 입국한 베르뇌 주교가 푸르티에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하자 푸르티에 신부를 도와 신학교 집주인으로서 신학교 운영을 뒷바라지하며 배론 회장으로 활동했다.
5. 배론에 들이닥친 군난의 불길

[ 푸르티에 신부의 요청으로 풀려나다 ]
1866년 박해가 일어나자, 3월 2일에 포졸들이 배론 신학교에도 들이닥쳐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했다.
이때 장주기 회장도 같이 잡혔으나 푸르티에 신부의 간청으로 포졸들은 그를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음날 신부들이 관아로 이송될 때 장주기도 함께 끌려가자 이를 본 푸르티에 신부가 항의했고, 포졸들은 장주기를 풀어주었다.
6. 다시 붙잡혀 제천 관아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다불길

배론 마을은 포졸들의 약탈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며칠 후에 장주기 회장은 이웃 노블린너굴(현재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서 다시 포졸들에게 잡혀 제천읍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이 선교사의 집주인이라고 말한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7. “크신 임금이요 크신 아버지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 신앙의 증거와 사형 판결 ]
서울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배교할 까닭이 전혀 없으니 어서 처분해 달라고 하면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결국 장주기 성인은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음으로써 평생 소원인 ‘위주치명(爲主致命,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침)’는 이루게 되었다.
8-1. 갈매못에서 64세의 나이로
치명의 꽃을 피우다

정주기 성인은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와 함께 보령 갈매못(현재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1866년 3월 30일(음력 2월 14일)에 칼을 받아 치명했다.
8-2. 갈매못에서 64세의 나이로
치명의 꽃을 피우다

장주기 성인은 치명 직전에 좌우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렇게 죽음이 성교(聖敎, 거룩한 천주교회)에 광영(光榮)이라” 라고 말했다.
9. 시대의 아픔 속에서 세상을 떠돌던 유해가
안식을 취하다

동료 치명자들과 함께 장주기 성인의 유해는 그해 신자들에 의해 수습되었으며, 1882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져 보관되었다.
그 후 1894년 5월에 조선천주교회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귀환했으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었다.
장주기 성인 유해는 1900년 11월에 명동성당 지하묘역으로 옮겨졌다가 1967년부터는 절두산성지로 옮겨져 현재까지 안식을 취하고 있다.
10. 장주기 성인의 가족 치명자들

장주기 성인의 가족 중 장 토마스 복자, 장경연, 장치선과 그 가족, 장한서 베드로와 홍씨 부부, 방씨, 방 프란치스카, 장사전은
군난 중에 온갖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 위주치명했다.
11. 우리도 장주기 성인과 그 가족을 본받고자…

[ 현양 성지 ]
장주기 성인이 신학교 집주인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던 배론성지, 신앙을 증거하고 목숨을 바친 갈매못성지, 신자들의 노력으로 유해가 이장되었던 서짓골성지에서
장주기 성인을 현양하고 있다. 또한 장주기의 육촌인 장 토마스 복자가 순교한 청주 장대터(음성 북문 밖)에도 순교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2-1.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 요당리성지 ]
장주기 성인과 가족들의 고향인 요당리성지에서는 성인과 그 가족들의 삶과 신앙, 순교를 기리고 있으며 오늘도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12-2.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요당리성지에는 장주기 성인을 비롯하여 그 가족 순교자들과 양간 지역 출신 순교자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12-3.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신앙선조들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신앙의 요람지

요당리성지에는 장주기 성인을 비롯하여 그 가족 순교자들과 양간 지역 출신 순교자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미지 출처: (좌)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
(중앙)확인 중
본 이미지는 성지 안내 목적의 임시 사용 중이며,
저작권 사용 승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정식 승인 후 사용 여부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제가 배우고 몸에 익힌 것은
대군대부1)의 성교2)이니,
형장 아래 만 번 죽더라도
만 번 하느님을 배척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장주기 성인의 신앙 증거, 포도청 심문에서
1)대군대부(大君大父) : 크신 임금이요
크신 아버지이신 하느님
2) 성교(聖敎) : 거룩한 천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