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간 지역과 신앙공동체의 발전
1. 양간 지역과 신앙공동체의 발전
요당리 성지는 양간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전개 속에서 박해와 순교, 선교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자리입니다.
아래 내용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요약이며, 보다 자세한 사료와 기록은 각 항목의 「관련 자료 보기 +」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양간 지역은 조선 후기 수원 고을에 속한 넓은 생활권으로, 사양리·포곡·석천·만어언리·만촌·요당리·용소리·기동 등 여러 마을이 함께 형성된 지역이었습니다.
1831년 박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수원 유수부 관아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남쪽 지역으로, 지리적으로는 내륙과 해안을 잇는 교통 경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박해 시기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19세기 초 신유박해 이후,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수로와 육로를 따라 경기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양간 지역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요당리는 이 양간 지역 안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마을로,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교우들이 모여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비록 초기 복음 전파 시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여러 사료와 연구를 통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 이미 신앙의 흔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이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박해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웃 마을들과 느슨하게 연결된 교우촌의 형태로 유지되며 이후 공소 설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박해시대인 1831년 (순조 31년) 당시 수원유수(水原留守)였던 박기수(朴綺壽)가 저술한 <화성지>(華城誌)에 의하면, 양간면(楊澗面)은 수원 고을에 속한 40개 면(面) 중의 하나로서 유수부 관아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었고 ① 사양리(思養里), ② 포곡(浦谷), ③ 석천(石川), ④ 만어언리(晩於堰里), ⑤ 만촌(晩村), ⑥ 요당리(蓼塘里), ⑦ 용소리(龍巢里), ⑧ 기동(基洞), ⑨ 가오실리(加五實里), 신왕동(新往洞), 독조리(獨調里) 등 모두 11개의 동리(洞里)가 속해 있었다.
| 박해시대(1831년) <화성지> |
구한말(1899년) <수원군읍지> |
일제시대(1914년) <수원군지> |
2006년 현재지명 <화성시사> |
||||
|---|---|---|---|---|---|---|---|
| 華 城 留 守 府 楊 澗 面 |
思養里(사양리) | 水 原 郡 楊 澗 面 |
左와 同一 | 水 原 郡 楊 甘 面 |
華 城 市 楊 甘 面 |
대양리 사양이 | |
| 浦谷(포곡) | “ | 대양리 개월?? | |||||
| 石川(석천) | “ | 요당리 돌내 | |||||
| 晩於堰里(만어언리) | “ | 대양리 넛들장뚝?? | |||||
| 晩村(만촌) | “ | 요당리 느지지 | |||||
| 蓼塘里(요당리) | “ | 요당리 요당이 | |||||
| 龍巢里(용소리) | “ | 용소리 용소말 | |||||
| 基洞(기동) | 基洞(기동) | 고렴리 덕지사터?? | |||||
| 加五實里(가오실리) | 左와 同一 | ???? | |||||
| 新往洞(신왕동) | “ | 신왕리 | |||||
| 獨調里(독조리) | “ | 신왕리 독줄 | |||||
2006년 현재의 “양감면(楊甘面)”은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의 조치에 의해, 박해시대부터 구한말까지 변동없이 내려오던 양간면(楊澗面) 외에도 감미면(甘味面)·상홀면(床笏面)·진위군(振威郡) 율북면(栗北面)의 일부분을 통합하였고, ‘양간’과 ‘감미’의 첫 글자를 따서 ‘양감면’이라고 고쳐 불렀다.
수원 고을의 ‘양간’지역에 언제 복음이 전파되었는지 현재까지 명확히 알려진 사실은 없다. 다만 ‘양간’을 포함한 수원 고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유박해 이전 초기교회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관찬사료<邪學懲義>(사학징의)에 의하면 한양 도저동(挑渚洞)에 거하던 마병(馬兵) 이지번(李枝蕃)의 장인인 이지성(李之盛)이라는 신자가 1801년 3월 당시 수원에 살고 있었으며 사위 인 이지번에게 천주교 서적을 주면서 신앙을 권면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1790년경 평택현감으로 부임하여 관아(官衙)에서 30리 쯤 떨어진 대추리에 가서 전교하였다는 사실이 구전되고 있으므로, 평택과 가까운 수원 고을에도 1790년대부터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19세기 초반부터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서울과 충청도 내포(內浦) 등지의 신자들이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그동안 신자들이 살지 않던 경기도의 산간 내륙지역으로 피난하면서 수원 고을 내에도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될 여지가 많아졌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질서(位階秩序)와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에 입각한 척사(斥邪)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도 강했던 수원고을 내에서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엄격하게 실시되어 관가(官家)는 물론 일반 향촌사회의 문중(門中)이나 가문(家門)의 차원에서도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일어나 1817년 감탕개에 살던 이용빈이란 신자는 전교를 하다가 친척들에 의해서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반 향촌사회의 척사적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830년대를 전후한 시점부터 수원 고을 내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33년 11월 서울의 형조에서 순교한 황석지(일명 사윤, 베드로)는 오래 전부터 고향인 수원 샘골에서 전 가족이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계명을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황사윤이 살았던 샘골(泉谷)은 당시의 행정구역상 화성유수부 현암면 천곡리(華城留守府 玄巖面 泉谷理)로 또는 화성유수부 양간면 신왕동(華城留守府 楊澗面 新往洞, 속칭 샘골, 생이로 불림)으로 추정된다.
요당리성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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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봉헌 축일(제대초봉헌안내)
+찬미예수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성지에서 1년 동안 사용할 제대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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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미사 안내
+찬미예수님 재의 수요일 미사 성지에서 2월18일(수요일) 11시미사 소성당에서 있습니다. 설…
-
주님 봉헌 축일 미사안내
+찬미예수님 주님봉헌 축일 (2월2일 월요일) 11시미사 소성당에서 있습니다. 미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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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공지(1월27일~1월29일)
새해에도 주님 은총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6년1월27일(화요일)~1월29일(목요일) 화성지구사제모임 사제연수 관계로 미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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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 성지는 양간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전개 속에서 박해와 순교, 선교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자리입니다.
아래 내용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요약이며, 보다 자세한 사료와 기록은 각 항목의 「관련 자료 보기 +」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양간 지역은 조선 후기 수원 고을에 속한 넓은 생활권으로, 사양리·포곡·석천·만어언리·만촌·요당리·용소리·기동 등 여러 마을이 함께 형성된 지역이었습니다.
1831년 박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수원 유수부 관아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남쪽 지역으로, 지리적으로는 내륙과 해안을 잇는 교통 경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박해 시기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19세기 초 신유박해 이후,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에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수로와 육로를 따라 경기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양간 지역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요당리는 이 양간 지역 안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마을로,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교우들이 모여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비록 초기 복음 전파 시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여러 사료와 연구를 통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 이미 신앙의 흔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이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박해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웃 마을들과 느슨하게 연결된 교우촌의 형태로 유지되며 이후 공소 설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박해시대인 1831년 (순조 31년) 당시 수원유수(水原留守)였던 박기수(朴綺壽)가 저술한 <화성지>(華城誌)에 의하면, 양간면(楊澗面)은 수원 고을에 속한 40개 면(面) 중의 하나로서 유수부 관아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었고 ① 사양리(思養里), ② 포곡(浦谷), ③ 석천(石川), ④ 만어언리(晩於堰里), ⑤ 만촌(晩村), ⑥ 요당리(蓼塘里), ⑦ 용소리(龍巢里), ⑧ 기동(基洞), ⑨ 가오실리(加五實里), 신왕동(新往洞), 독조리(獨調里) 등 모두 11개의 동리(洞里)가 속해 있었다.
| 박해시대(1831년) <화성지> |
구한말(1899년) <수원군읍지> |
일제시대(1914년) <수원군지> |
2006년 현재지명 <화성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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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 城 留 守 府 楊 澗 面 |
思養里(사양리) | 水 原 郡 楊 澗 面 |
左와 同一 | 水 原 郡 楊 甘 面 |
華 城 市 楊 甘 面 |
대양리 사양이 | |
| 浦谷(포곡) | “ | 대양리 개월?? | |||||
| 石川(석천) | “ | 요당리 돌내 | |||||
| 晩於堰里(만어언리) | “ | 대양리 넛들장뚝?? | |||||
| 晩村(만촌) | “ | 요당리 느지지 | |||||
| 蓼塘里(요당리) | “ | 요당리 요당이 | |||||
| 龍巢里(용소리) | “ | 용소리 용소말 | |||||
| 基洞(기동) | 基洞(기동) | 고렴리 덕지사터?? | |||||
| 加五實里(가오실리) | 左와 同一 | ???? | |||||
| 新往洞(신왕동) | “ | 신왕리 | |||||
| 獨調里(독조리) | “ | 신왕리 독줄 | |||||
2006년 현재의 “양감면(楊甘面)”은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의 조치에 의해, 박해시대부터 구한말까지 변동없이 내려오던 양간면(楊澗面) 외에도 감미면(甘味面)·상홀면(床笏面)·진위군(振威郡) 율북면(栗北面)의 일부분을 통합하였고, ‘양간’과 ‘감미’의 첫 글자를 따서 ‘양감면’이라고 고쳐 불렀다.
수원 고을의 ‘양간’지역에 언제 복음이 전파되었는지 현재까지 명확히 알려진 사실은 없다. 다만 ‘양간’을 포함한 수원 고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유박해 이전 초기교회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관찬사료<邪學懲義>(사학징의)에 의하면 한양 도저동(挑渚洞)에 거하던 마병(馬兵) 이지번(李枝蕃)의 장인인 이지성(李之盛)이라는 신자가 1801년 3월 당시 수원에 살고 있었으며 사위 인 이지번에게 천주교 서적을 주면서 신앙을 권면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1790년경 평택현감으로 부임하여 관아(官衙)에서 30리 쯤 떨어진 대추리에 가서 전교하였다는 사실이 구전되고 있으므로, 평택과 가까운 수원 고을에도 1790년대부터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19세기 초반부터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서울과 충청도 내포(內浦) 등지의 신자들이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따라 그동안 신자들이 살지 않던 경기도의 산간 내륙지역으로 피난하면서 수원 고을 내에도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될 여지가 많아졌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질서(位階秩序)와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에 입각한 척사(斥邪)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도 강했던 수원고을 내에서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엄격하게 실시되어 관가(官家)는 물론 일반 향촌사회의 문중(門中)이나 가문(家門)의 차원에서도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일어나 1817년 감탕개에 살던 이용빈이란 신자는 전교를 하다가 친척들에 의해서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반 향촌사회의 척사적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830년대를 전후한 시점부터 수원 고을 내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833년 11월 서울의 형조에서 순교한 황석지(일명 사윤, 베드로)는 오래 전부터 고향인 수원 샘골에서 전 가족이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계명을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황사윤이 살았던 샘골(泉谷)은 당시의 행정구역상 화성유수부 현암면 천곡리(華城留守府 玄巖面 泉谷理)로 또는 화성유수부 양간면 신왕동(華城留守府 楊澗面 新往洞, 속칭 샘골, 생이로 불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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