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888년 이후 왕림본당 관할하의 양간공소

요당리 성지는 양간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전개 속에서 박해와 순교, 선교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자리입니다.
아래 내용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요약이며, 보다 자세한 사료와 기록은 각 항목의 「관련 자료 보기 +」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888년 왕림본당이 설립되면서, 양간 공소는 본당 관할 아래 편입되어 보다 안정적인 신앙 공동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공소는 정기적인 성사 집전과 교우 관리가 가능해졌고, 교우 수와 활동 내역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문헌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양간 공소는 일정 규모의 교우 공동체를 유지하며, 본당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박해 시기의 불안정한 공동체에서, 제도적 교회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발안본당으로 이속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본당 체계 속에서 양간 지역 신앙 공동체의 흐름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은 지역 교회가 시대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888년 현재의 수원 교구에 속한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 내에서는 최초로 왕림 즉 갓등이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양간 지역도 왕림본당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시기 양간 공소의 교세 변화를 일람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위 표에서 각 연도별 교세통계는 전년도 5월부터 해당년도 4월까지의 수치임.

위 표3을 통해보면 왕림본당이 설립된 후 그 관할 공소가 된 양간 공소의 교세는 해마다 약간씩 변동이 있었으나 1910년까지 대체로 100 ~110명 선을 유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이후 1911년부터는 130명 선을 유지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1917년 무렵부터 양간 공소와 느지지공소가 분리되어 용소리(龍沼里)에 위치한 양간 공소는 130~140명, 요당리(蓼塘里)에 위치한 느지지 공소는 30명 내외의 교우수가 따로 기록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57년 왕림본당에서 발안본당이 분리 독립되자 양간 지역의 두 공소인 양간공소와 느지지 공소도 모두 발안본당 소속으로 옮겨가서 현재에 이른다.

이상에서 각종 문헌자료와 구전을 통하여 살펴본 양간 지역 교회사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양간 지역에는 1839년 기해박해 이전에 모방 신부에 의해 공소가 설립되어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정하상 등 평신도 회장과 함께 순방하며 성사를 집행하였고, 동시기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양간 공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손경서 순교자와 함께 앵베르 주교를 양간의 상게 지역에 은신시켜 주었고,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이 양간 지역의 교회전답을 관리하고 있었다. 기해박해 직전에 형성된 양간 공소는 정화경 성인의 집이었는데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후 병인박해 때까지 일부의 신자는 이곳에 남아 있었으나 일부는 이곳을 떠나 인근 공소로 이동하였음이 확인된다. 한편 병인박해가 끝나고 개항 직후에 다시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양간 지역에도 찾아와 성사를 집행하면서 1884년 무렵 양간의 ‘느지지’가 뮈텔 신부에 의해 다시 공소로 설정되기 시작하였는데, 1885년부터 ‘양간’이란 명칭으로 공소가 지속되었다. 양간 공소는 이후 프와넬 신부를 거쳐 1888년부터 왕림본당의 관할 하에 속하게 되어 1920년대까지 대략 100~170명의 신자들이 교세 통계표에 의해 확인된다. 특이한 점은 1917년부터 양간 지역에 기존의 양간 공소(*용소리 위치) 외에 느지지 공소(*요당리 위치)가 따로 설정되어 교세통계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중에서 용소리 공소는 1869년 수원에서 순교한 지 다태오 순교자와 병인박해기 양지의 응다라니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림 베드로 순교자의 출신지이며, 요당리의 느지지 공소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과 장 토마스 가경자의 출생지이다. 따라서 이 두 곳 중의 어느 한 곳이 정화경 성인이 거주하면서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한 곳일 가능성이 많고, 박해시대부터 개화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양간 지역 신자들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요당리 성지는 양간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전개 속에서 박해와 순교, 선교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자리입니다.
아래 내용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요약이며, 보다 자세한 사료와 기록은 각 항목의 「관련 자료 보기 +」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888년 왕림본당이 설립되면서, 양간 공소는 본당 관할 아래 편입되어 보다 안정적인 신앙 공동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공소는 정기적인 성사 집전과 교우 관리가 가능해졌고, 교우 수와 활동 내역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문헌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양간 공소는 일정 규모의 교우 공동체를 유지하며, 본당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박해 시기의 불안정한 공동체에서, 제도적 교회 구조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발안본당으로 이속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본당 체계 속에서 양간 지역 신앙 공동체의 흐름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은 지역 교회가 시대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888년 현재의 수원 교구에 속한 한강 이남의 경기도 지역 내에서는 최초로 왕림 즉 갓등이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양간 지역도 왕림본당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시기 양간 공소의 교세 변화를 일람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년 도 1888년1891년1892년1897년1898년 1901년1902년1903년1904년1910년
교우수 117명86명122명162명131명 100명80명103명102명110명
담당신부 앙드레알릭스알릭스알릭스알릭스 알릭스알릭스알릭스알릭스알릭스

위 표에서 각 연도별 교세통계는 전년도 5월부터 해당년도 4월까지의 수치임.

위 표3을 통해보면 왕림본당이 설립된 후 그 관할 공소가 된 양간 공소의 교세는 해마다 약간씩 변동이 있었으나 1910년까지 대체로 100 ~110명 선을 유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이후 1911년부터는 130명 선을 유지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1917년 무렵부터 양간 공소와 느지지공소가 분리되어 용소리(龍沼里)에 위치한 양간 공소는 130~140명, 요당리(蓼塘里)에 위치한 느지지 공소는 30명 내외의 교우수가 따로 기록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57년 왕림본당에서 발안본당이 분리 독립되자 양간 지역의 두 공소인 양간공소와 느지지 공소도 모두 발안본당 소속으로 옮겨가서 현재에 이른다.

이상에서 각종 문헌자료와 구전을 통하여 살펴본 양간 지역 교회사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양간 지역에는 1839년 기해박해 이전에 모방 신부에 의해 공소가 설립되어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정하상 등 평신도 회장과 함께 순방하며 성사를 집행하였고, 동시기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양간 공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손경서 순교자와 함께 앵베르 주교를 양간의 상게 지역에 은신시켜 주었고,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이 양간 지역의 교회전답을 관리하고 있었다. 기해박해 직전에 형성된 양간 공소는 정화경 성인의 집이었는데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후 병인박해 때까지 일부의 신자는 이곳에 남아 있었으나 일부는 이곳을 떠나 인근 공소로 이동하였음이 확인된다. 한편 병인박해가 끝나고 개항 직후에 다시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양간 지역에도 찾아와 성사를 집행하면서 1884년 무렵 양간의 ‘느지지’가 뮈텔 신부에 의해 다시 공소로 설정되기 시작하였는데, 1885년부터 ‘양간’이란 명칭으로 공소가 지속되었다. 양간 공소는 이후 프와넬 신부를 거쳐 1888년부터 왕림본당의 관할 하에 속하게 되어 1920년대까지 대략 100~170명의 신자들이 교세 통계표에 의해 확인된다. 특이한 점은 1917년부터 양간 지역에 기존의 양간 공소(*용소리 위치) 외에 느지지 공소(*요당리 위치)가 따로 설정되어 교세통계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중에서 용소리 공소는 1869년 수원에서 순교한 지 다태오 순교자와 병인박해기 양지의 응다라니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림 베드로 순교자의 출신지이며, 요당리의 느지지 공소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장주기 요셉 성인과 장 토마스 가경자의 출생지이다. 따라서 이 두 곳 중의 어느 한 곳이 정화경 성인이 거주하면서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한 곳일 가능성이 많고, 박해시대부터 개화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양간 지역 신자들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