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박해기 양간 공소의 설립과 활동
2. 박해기 양간 공소의 설립과 활동
요당리 성지는 양간 지역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전개 속에서 박해와 순교, 선교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자리입니다.
아래 내용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요약이며, 보다 자세한 사료와 기록은 각 항목의 「관련 자료 보기 +」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양간 공소와 은신처 상계의 위치 비정)
양간 공소는 박해 시기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형성한 공동체 공간이었습니다.
공식적인 설립 연대나 정확한 위치는 문헌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증언과 사료를 종합하면 1830년대 전후 이미 공소로서의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공소는 오늘날과 같은 건물 중심의 공간이 아니라, 신자들의 가정이나 은신처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동적인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성직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동하며 잠시 머물러 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은 이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양간 지역은 지형적 특성상 외부의 감시를 피하기에 비교적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공소와 은신처가 함께 기능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문헌에서는 공소의 위치가 고정되지 않고 시기와 상황에 따라 이동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박해기 신앙 공동체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살펴본 황석지(사윤) 베드로의 경우는 양간 출신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일단 공소 설립과는 관련짓는 것은 유보해둔다. 그러나 이밖에도 1836년 초에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등 조선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당시 갓 입국하여 교구장의 권한을 대리하던 모방 신부에게 보고한 각 지역별 교우촌과 그곳의 교세(敎勢) 보고에 의하면 수원 지역에도 교우촌이 설립되어 있었고 대략 130~140명의 교우가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말한 수원 지역의 교우촌이 구체적으로 당시 수원유수부내 어느 면(面) 또는 동(洞)인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주고 있지 않으므로, 1836년 초 양간에 공소가 있었는지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 도로테아, 오 바시리오 등 박해시대의 목격자들이 1884년 뮈텔 신부 앞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등으로부터 수원 지역의 교우촌 현황에 대해 보고받은 모방 신부가 이후 경기도내 11-13곳에 달하는 다른 교우촌들과 함께 이곳 양간에도 여러 차례 순방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였다고 하므로, 늦어도 1839년 기해박해 이전까지 수원 고을의 양간 지역에는 공소(公所)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가)-① : 죄인의 성은 김씨요 본명은 도로테아요 태생은 수원 남면 환도골이요 부친은 김 바오로요 모친은 이 막달레나요 죄인의 나이는 정해생, 58세요 아홉 살에 문교하여 무술년 섣달에 나 신부께 영세하고 18세에 최 도마에게로 혼배하여 수원 양간서 사옵다가 신미년에 군난에 쫓기어 서울로 와 살더니···(*회차62-1884.3.20)
(가)-② : 죄인이 무술년에 나 신부께 영세하고 기해 정월에 범 주교께 고해 성사를 받았더니 그해 군난이 대기함에 범 주교가 피신하시어 수원 상귀에 숨어 계실 때에 김 여상이라 하는 유다스가 7월에 죄인 사는 양간 동네로 포교를 데리고 부교를 타고 와 정 안드레아 화경이를 찾아 하는 말이 이제 광양이 되었으나 겁내지 말고 우리는 주교, 신부를 모시러 왔으니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 간절히 빈즉 정 안드레아가 그 꾀에 빠져 주교, 신부 계신 곳을 가르친지라. 죄인이 그때 13세 되어 김 여상이와 포교들이 오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어린 동생을 업고 산으로 도망하였더니···(*회차62-1884.3.20)
(가)-③ : 정 안드레아 화경이는 수원 양간서 죄인과 한 동네에서 사는 고로 어려서부터 많이 보았으니 회장 소임을 맡아 성사 때면 자기 집에 공소를 꾸며 모든 교우를 성사 받게 하더니 열심 수계할 뿐 외에 남을 권화하기를 힘쓰며···(*회차62-1884.3.20)
(나)-① : 죄인의 성은 오씨요 본명은 바시리오요 태생은 목천 씨아골이요 부친은 오 암부르시오, 모친은 황 루시아요 죄인의 나이는 임신생 73세요, 태중 교우로서 20여 세에 유 신부께 영세하고 17세에 오 벨베두아와 혼배하여 양지 응이(은이)서 사옵다가 여러 번 이사한 후에 아내가 정축년에 죽음에 홀로 되어 아들에게 의지하여 공주 땅에서 사오니 가세 극빈하외다.···(*회차69-1884.4.23)
(나)-② : 기해년 군난 때 죄인이 수원 샘골서 사는 연고로 군난 당한 사정은 많이 모르오나 그때 치명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여럿이오니 ··· 정 바오로는 조선교우를 위하여 힘 많이 쓴 사람이라. 유 아오스딩과 상의하여 여러 번 연행하며 주교, 신부 영접하기를 힘쓰며 주교 복사로 있을때 죄인이 한번 수원 양간 공소에서 보고 주교를 뫼시고 같이 다른 공소로 가다가 중로에서 작별하고···(*회차69-1884.4.23)
(나)-③ : 정 안드레아 화경이도 아는 사람이오니 그 성품이 순박하고 똑똑치 못하고 말도 드물게 하나 열심 수계하더라. 본래 충청도 정산서 요부히 살다가 토질로 신고함에 그곳을 떠나 수원 양간으로 이사하여 올 때 본 고향에 있는 전답을 주교께 바쳤더라. 양간으로 와서 회장 소임을 맡아 본분을 다함으로 모든 교우의 칭찬한 바이더니 기해년 군난이 대치함에 범 주교를 모시고 수원 상귀 동네에 숨어 계시게 하고 자기만 알며 다른 교우는 모르게 하였더니, 김 여상이가 그 사정을 알고 양간으로 내려와 정 안드레아를 속여 달래며 주교 계신 곳을 가르쳐 주기를 간청한 즉 안드레아가 속임을 입어 여상이를 데리고 주교 계신 데로 가니 주교가 잡히신지라. 이를 보고야 후회하며 치명할 원의로 돌담거리 주막까지 주교를 따라가니···(*회차69-1884.4.23)
(나)-④ : 현 갸오로도 여러 번 보았으니 매양 가을이면 응이(은이)로 내려와 수삭이나 유하며 교우를 권면하며 덕망이 있는 사람이러니 유 신부 때 죄인이 서울 와서 영세할 제 현 갸오로가 대부를 섰더니 ······ 한 나우렌시오는 응이(은이)서 살며 회장 소임을 당하여 열심 수계하고 교우를 만나는대로 제성하여 애주애인이 진절하며 그 덕행과 표양을 모든 교우들이 찬양하며 일컫더니, 죄인도 여러 해 친한 사람이나 ······ 범 주교께 성사 한번 하고 나 신부께 두 번을 수원 양간 공소에서 보았으니 신사네는 조선말을 하나 아직 널리 통치 못하신 고로 성사 주실 때 주야에 애를 쓰시고 교우들도 고해하는 규구에 서툴고 또 첫 성사를 받는 교우가 태반인 고로 그 수고하심을 형용치 못할 것이요 모든 교우들이 찬미하고 사랑하여 극진히 공경하였습니다.···(*회차70-1884.4.24)
위의 증언 (가)-①을 통해 볼 때, 증언자 김 도로테아는 1827년생(=丁亥年生)으로 수원 남면 환도골 태생이다. 남면(南面)은 양간면(楊澗面)의 서쪽에 위치하며 인접한 곳이다. 그녀는 1835년경 천주교에 예비 입교하여 1839년 초(=戊戌年 섣달)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해년 초(=1839년 봄)에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고해성사를 받았으며, 1844년 최 도마와 혼배(婚配)하여 1871년 신미양요때까지 양간에 살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②와 (가)-③을 보면, 그녀는 혼배하기 전인 1839년 기해박해 당시에 이미 양간에 살았으며, 유다스 김순성이 양간으로 찾아와 정화경을 유인하여 상게에 은신했던 앵베르 주교를 체포해간 사실에 대해서 목격과 전문을 통해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김 도로테아는 기해박해 직전에 양간 공소에서 모방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와서 집전하는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 바시리오는 증언 (나)-①과 (나)-④를 통해 볼 때, 1812년(=임신년) 목천 씨아골 태생으로 17세 때인 1828년부터 당시 양지 고을의 은이에서 살다가, 여러 곳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 무렵에는 수원 고을의 샘골에서 살았는데, 이때 양간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서 2번, 앵베르 주교에게서 1번의 성사를 받았으며, 앵베르 주교를 만났을 때는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다른 공소로 주교를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사항은, 오 바시리오가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으로부터 도합 3번의 성사를 받은 곳이 양간 공소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는 샘골 출신이라고 하므로, 그가 살던 곳이 당시 수원유수부에 속하며 아산만에 접한 현덕면의 천곡리(샘골)였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공소가 없었거나, 아니면 그가 살던 샘골이 현덕면의 샘골이 아닌 곧 양간면의 신왕동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추찰해낼 수 있다. 이중에서 전자의 경우로 가정하면, 오 바시리오는 매번 공소 때마다 현덕면 샘골에서 양간면까지 대략 30리 정도의 길을 걸어와서 선교사들을 만나 성사를 받았던 것으로 해석되고 후자의 경우로 가정할 때는 자기 마을 또는 인근 동네에서 비교적 쉽게 성사를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1884년에 증언한 두 명의 목격증인들에게서도 공소의 위치가 양간면내 어디였다고 구체적으로 그 동네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다만 김 도로테아의 증언(가)-③에 의하면, 기해박해 때는 정화경 안드레아가 양간 공소의 회장으로서 자기 집에 공소를 차렸다고 하므로 정화경 성인의 집이 어디였는지를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양간 지역의 어느 한 곳에 정화경 성인의 거주지 겸 기해박해 당시의 공소(公所) 자리를 비정할 때 고려할 점은 그곳이 그가 앵베르 주교를 은신시켜 준 상게와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양간 지역에서 바다 또는 이와 이어진 내륙 하천의 포구(浦口)와 연결될 수 있는 곳은 서쪽의 요당리(느지지)나 동쪽의 용소말로 간추려진다. 만약 요당리(느지지)가 정화경 성인의 거주지였다면 앵베르 주교가 은신했던 상게 마을은 양간면에 접한 현재의 발안천이 흘러 들어가는 남양만에 이어지는 장소로, 장안면 우정면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용소리가 정화경 성인의 거주지였다면 역시 양간면에 접한 현재의 진위천이 흘러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두 후보지 중 교회사가 달레 신부가 기술한 것처럼 바다 쪽으로 길고 가느다랗게 들어간 곶(串) 또는 이와 비슷하게 생긴 바닷가 지역으로, 유사시 바다를 통해 재빨리 다른 고장으로 이동할 수 있고, 또 서울에서 한강을 통해 대략 300리(=120Km)정도 떨어진 곳이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전자이다. 그러므로 기해박해기의 양간 공소의 위치를 앵베르 주교의 은신처인 상게 지역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보다 합리적이고 실상에 근접하는 곳은 장주기 요셉 성인의 탄생지이기도 한 느지지 또는 느지지가 속한 요당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정화경 성인이 기해박해 때 관가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므로 그의 재산은 적몰되고 남은 가족은 유배를 가거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을 것이므로, 정화경 성인의 순교 후에 양간 공소는 더 이상 같은 곳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기해박해 이후 양간 지역의 신자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공소는 어디로 옮겨갔을까? 이에 대해서는 병인박해와 관련된 여러 증인들의 목격 또는 전문 증언을 통해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① : 지 다두
본디 수원 양간 용수말 살더니, 수원 서남 인광(리)로 이사하여 살더니 병인 1월에 본 읍 포교 안호범에게 잡히어 옥중에 갇혔더니, 일정 치명하기로 뜻을 정하여 형벌을 감심하여 받더니 그 큰 아들이 저의 처자와 권속을 살려 달라 하고 3차를 애걸하여 듣지 않더니, 이에 배교하고 나와 통회를 간절히 하더니 기사 4월 15일에 자원으로 본 읍 포교 노판용에게 잡혀 수원에 갇혔더니, 5월 23일에 위주 치명하니 나이는 51세요. 증인은 김대인이니 죽다. 수원 동청이 지 시몬, 치명자의 아들이라.(*치명사적 1-48)
(다)-② : 홍원여 갸오로
본래 수원 양간 살더니, 신미년 3월에 경포에게 잡혀 이 아래 있는 조(曺)명오와 한가지로 우변에와 한가지로 치명하니, 나이는 23세요 때는 그해 4월이러라.(*치명사적2-133)
(다)-③-ⓐ : 曺명오
본래 수원 양간 살더니, 이 위 홍 갸오로보다 3일 전 기하여 잡혀 홍 갸오로와 한가지로 우변에 와 같이 치명하니 나이는 대개 50세올시다. 증인은 종현 성당에서 식복사하던 홍 벨라도요, 또한 이 위 치명한 갸오로의 6촌 종제올시다.(*치명사적2-134)
(다)-③-ⓑ : 曺명오 베드로
조 베드로 명오는 본데 수원 양간사람으로 열심 수계하다가 군난 전에 3년을ㄹ 냉담하더니, 임신 3월 26일에 경포에게 잡혀 배교하여도 형벌이 심하여 누까지 빠지니 즉시 주모경과 신경을 외워 이르되 “수삼년은 성교를 잘 못하였다” 하고 서울로 간 후에 잡아간 포교에게 물은즉 “4월 25일에 죽었다”하더라. (이 말은 충주 너더리 사는 조 요한에게 들었노라.)(*치명사적6-61)
(다)-③-ⓒ : 曺명오 베드로
수원 양간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수원 돌모루에 거주하는 침치공에게 끌려 천주교를 배우고 그의 집에서 세례명을 짓고 영세함. 안주교(다블뤼 주교)에게 두 차례 고해성사를 봄(*좌포청등록 1871.3.28)
(다)-④ : 림 베드로
림 베드로는 본디 수원 용수말 사람으로 양지 은다라니 살더니, 수원 포교에게 정 안드레아와 림 요한과 림 안또니오와 이중화와 합 열두 사람이 교하여 죽었으며 이 열두 사람의 성, 본명은 대개 알 듯 하기는 석바랑이 정 회장과 검은정이 림 회장 두 사람이 아나이다. 증인은 림 베드로의 자부 양지 은이 사는 림 데레사외다.(*치명사적1-88)
(다)-⑤ : 권 요한
서울, 권 요한, 동(童), 본데 수원 생골(샘골?)사는 권양수의 아들로 배론 학당에서 공부하여 4품받고 병인년 풍파에 수원 건이로 와서 선생하다가 신미년 2월에 경포에게 잡혀 치명하니, 연이 35세올시다. 증인은 김 마리아(*치명사적2-129, *치명일기 270번)
(다)-⑥ : 홍기현(洪基賢, 베드로)
수원 양간에서 태어나 살았고 수원 돌모루에 거주하는 김치공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장주교(베르뇌주교)에게 세례명을 받고 영세함.(*좌포청등록 1871.3.28)
이상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병인박해와 관련된 증언자료 내지 관가기록을 보면 기해박해로 양간 공소회장 정화경 안드레아가 순교한 후에도, 양간 지역에는 조명오, 홍기현 등 몇 명의 신자들이 남아서 때로 다블뤼 주교나 베르뇌 주교의 공소 방문을 통해 성사를 받았을 가능성이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성사를 받았던 장소가 양간이었는지, 아니면 이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해준 김치공이 살던 돌모루(*현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원래 양간 출신으로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던 지다두(*안중으로 이주), 림 베드로(*양지 응다라니로 이주), 권 요한(*배론 학당으로 유학감) 등의 예를 통하여 추측해보건대, 기해박해 후 양간에 살던 다수의 신자들이 타지로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따라서 양간 공소가 기해박해 후에도 계속 잔존하여 공소의 구실을 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약 10년에 걸친 병인박해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개항(1876년)을 전후하여 해외로 피신했던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경기도 각지를 순방하면서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양간 지역에도 ‘느지지’마을에 다시 공소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보존된 1883년 5월부터 1884년 4월까지 경기도 지방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집전한 결과를 기록한 뮈텔 신부의 교세통계표에는 수원 고을에 속한 세 곳의 공소명이 불어로 ‘Ken-eui'(건의), ’Neu-tji-tji'(느지지), ‘Katteung-i'(갓등이)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느지지‘는 바로 당시 행정구역상 수원유수부 양간면에 속했던 ’만촌(晩村)‘을 가리키는데 오늘날의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 속한 작은 동네이다. 그런데 수원 고을에서 개항 이후 선교사에 의해 처음으로 성사가 집행된 위 세 곳은 이미 박해시대 때부터 형성된 오래된 구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박해시대의 양간 공소가 느지지(晩村) 동네에 있었을 가능성도 추정되지만, 한편으로 박해로 인하여 새롭게 옮겨진 교우들의 거점일 수도 있으므로 속단하기는 곤란하다. 아무튼 당시 이곳 느지지 공소에 모인 교우는 모두 47명에 달하며 이중에서 23명이 당년에 방문한 뮈텔 신부에게서 고해성사를 받고 19명이 사규영성체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뮈텔 신부가 그 다음해에도 양간을 방문했는데, 이때는 교우수 40명, 사규고해 31명, 사규영성체 19명으로 기록되어 큰 변동이 없이 공소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뮈텔 신부에 이어 1885년부터 1886년까지 이곳을 방문한 프와넬 신부의 보고에는 교우수가 다소 증가한 60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해 프와넬 신부가 방문했을 때는 교우수가 103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규고해자와 사규영성체자의 수도 각각 57명, 36명으로 증가하였다. 1880년 중반에 이같이 양간 느지지 공소의 교우수와 성사 참가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1886년 한불조약을 기점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행위가 묵인된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박해로 인해 각지로 피신한 신자들이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왔거나 원래 지역에서 냉담하면서 한 동안 신앙을 꺼려했던 신자들이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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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③ : 정 안드레아 화경이는 수원 양간서 죄인과 한 동네에서 사는 고로 어려서부터 많이 보았으니 회장 소임을 맡아 성사 때면 자기 집에 공소를 꾸며 모든 교우를 성사 받게 하더니 열심 수계할 뿐 외에 남을 권화하기를 힘쓰며···(*회차62-1884.3.20)
(나)-① : 죄인의 성은 오씨요 본명은 바시리오요 태생은 목천 씨아골이요 부친은 오 암부르시오, 모친은 황 루시아요 죄인의 나이는 임신생 73세요, 태중 교우로서 20여 세에 유 신부께 영세하고 17세에 오 벨베두아와 혼배하여 양지 응이(은이)서 사옵다가 여러 번 이사한 후에 아내가 정축년에 죽음에 홀로 되어 아들에게 의지하여 공주 땅에서 사오니 가세 극빈하외다.···(*회차69-1884.4.23)
(나)-② : 기해년 군난 때 죄인이 수원 샘골서 사는 연고로 군난 당한 사정은 많이 모르오나 그때 치명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여럿이오니 ··· 정 바오로는 조선교우를 위하여 힘 많이 쓴 사람이라. 유 아오스딩과 상의하여 여러 번 연행하며 주교, 신부 영접하기를 힘쓰며 주교 복사로 있을때 죄인이 한번 수원 양간 공소에서 보고 주교를 뫼시고 같이 다른 공소로 가다가 중로에서 작별하고···(*회차69-1884.4.23)
(나)-③ : 정 안드레아 화경이도 아는 사람이오니 그 성품이 순박하고 똑똑치 못하고 말도 드물게 하나 열심 수계하더라. 본래 충청도 정산서 요부히 살다가 토질로 신고함에 그곳을 떠나 수원 양간으로 이사하여 올 때 본 고향에 있는 전답을 주교께 바쳤더라. 양간으로 와서 회장 소임을 맡아 본분을 다함으로 모든 교우의 칭찬한 바이더니 기해년 군난이 대치함에 범 주교를 모시고 수원 상귀 동네에 숨어 계시게 하고 자기만 알며 다른 교우는 모르게 하였더니, 김 여상이가 그 사정을 알고 양간으로 내려와 정 안드레아를 속여 달래며 주교 계신 곳을 가르쳐 주기를 간청한 즉 안드레아가 속임을 입어 여상이를 데리고 주교 계신 데로 가니 주교가 잡히신지라. 이를 보고야 후회하며 치명할 원의로 돌담거리 주막까지 주교를 따라가니···(*회차69-1884.4.23)
(나)-④ : 현 갸오로도 여러 번 보았으니 매양 가을이면 응이(은이)로 내려와 수삭이나 유하며 교우를 권면하며 덕망이 있는 사람이러니 유 신부 때 죄인이 서울 와서 영세할 제 현 갸오로가 대부를 섰더니 ······ 한 나우렌시오는 응이(은이)서 살며 회장 소임을 당하여 열심 수계하고 교우를 만나는대로 제성하여 애주애인이 진절하며 그 덕행과 표양을 모든 교우들이 찬양하며 일컫더니, 죄인도 여러 해 친한 사람이나 ······ 범 주교께 성사 한번 하고 나 신부께 두 번을 수원 양간 공소에서 보았으니 신사네는 조선말을 하나 아직 널리 통치 못하신 고로 성사 주실 때 주야에 애를 쓰시고 교우들도 고해하는 규구에 서툴고 또 첫 성사를 받는 교우가 태반인 고로 그 수고하심을 형용치 못할 것이요 모든 교우들이 찬미하고 사랑하여 극진히 공경하였습니다.···(*회차70-1884.4.24)
위의 증언 (가)-①을 통해 볼 때, 증언자 김 도로테아는 1827년생(=丁亥年生)으로 수원 남면 환도골 태생이다. 남면(南面)은 양간면(楊澗面)의 서쪽에 위치하며 인접한 곳이다. 그녀는 1835년경 천주교에 예비 입교하여 1839년 초(=戊戌年 섣달)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해년 초(=1839년 봄)에는 앵베르 주교로부터 고해성사를 받았으며, 1844년 최 도마와 혼배(婚配)하여 1871년 신미양요때까지 양간에 살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②와 (가)-③을 보면, 그녀는 혼배하기 전인 1839년 기해박해 당시에 이미 양간에 살았으며, 유다스 김순성이 양간으로 찾아와 정화경을 유인하여 상게에 은신했던 앵베르 주교를 체포해간 사실에 대해서 목격과 전문을 통해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김 도로테아는 기해박해 직전에 양간 공소에서 모방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와서 집전하는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등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 바시리오는 증언 (나)-①과 (나)-④를 통해 볼 때, 1812년(=임신년) 목천 씨아골 태생으로 17세 때인 1828년부터 당시 양지 고을의 은이에서 살다가, 여러 곳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 무렵에는 수원 고을의 샘골에서 살았는데, 이때 양간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서 2번, 앵베르 주교에게서 1번의 성사를 받았으며, 앵베르 주교를 만났을 때는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다른 공소로 주교를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사항은, 오 바시리오가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등으로부터 도합 3번의 성사를 받은 곳이 양간 공소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는 샘골 출신이라고 하므로, 그가 살던 곳이 당시 수원유수부에 속하며 아산만에 접한 현덕면의 천곡리(샘골)였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공소가 없었거나, 아니면 그가 살던 샘골이 현덕면의 샘골이 아닌 곧 양간면의 신왕동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추찰해낼 수 있다. 이중에서 전자의 경우로 가정하면, 오 바시리오는 매번 공소 때마다 현덕면 샘골에서 양간면까지 대략 30리 정도의 길을 걸어와서 선교사들을 만나 성사를 받았던 것으로 해석되고 후자의 경우로 가정할 때는 자기 마을 또는 인근 동네에서 비교적 쉽게 성사를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1884년에 증언한 두 명의 목격증인들에게서도 공소의 위치가 양간면내 어디였다고 구체적으로 그 동네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다만 김 도로테아의 증언(가)-③에 의하면, 기해박해 때는 정화경 안드레아가 양간 공소의 회장으로서 자기 집에 공소를 차렸다고 하므로 정화경 성인의 집이 어디였는지를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양간 지역의 어느 한 곳에 정화경 성인의 거주지 겸 기해박해 당시의 공소(公所) 자리를 비정할 때 고려할 점은 그곳이 그가 앵베르 주교를 은신시켜 준 상게와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양간 지역에서 바다 또는 이와 이어진 내륙 하천의 포구(浦口)와 연결될 수 있는 곳은 서쪽의 요당리(느지지)나 동쪽의 용소말로 간추려진다. 만약 요당리(느지지)가 정화경 성인의 거주지였다면 앵베르 주교가 은신했던 상게 마을은 양간면에 접한 현재의 발안천이 흘러 들어가는 남양만에 이어지는 장소로, 장안면 우정면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용소리가 정화경 성인의 거주지였다면 역시 양간면에 접한 현재의 진위천이 흘러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두 후보지 중 교회사가 달레 신부가 기술한 것처럼 바다 쪽으로 길고 가느다랗게 들어간 곶(串) 또는 이와 비슷하게 생긴 바닷가 지역으로, 유사시 바다를 통해 재빨리 다른 고장으로 이동할 수 있고, 또 서울에서 한강을 통해 대략 300리(=120Km)정도 떨어진 곳이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전자이다. 그러므로 기해박해기의 양간 공소의 위치를 앵베르 주교의 은신처인 상게 지역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보다 합리적이고 실상에 근접하는 곳은 장주기 요셉 성인의 탄생지이기도 한 느지지 또는 느지지가 속한 요당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정화경 성인이 기해박해 때 관가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므로 그의 재산은 적몰되고 남은 가족은 유배를 가거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을 것이므로, 정화경 성인의 순교 후에 양간 공소는 더 이상 같은 곳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기해박해 이후 양간 지역의 신자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공소는 어디로 옮겨갔을까? 이에 대해서는 병인박해와 관련된 여러 증인들의 목격 또는 전문 증언을 통해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① : 지 다두
본디 수원 양간 용수말 살더니, 수원 서남 인광(리)로 이사하여 살더니 병인 1월에 본 읍 포교 안호범에게 잡히어 옥중에 갇혔더니, 일정 치명하기로 뜻을 정하여 형벌을 감심하여 받더니 그 큰 아들이 저의 처자와 권속을 살려 달라 하고 3차를 애걸하여 듣지 않더니, 이에 배교하고 나와 통회를 간절히 하더니 기사 4월 15일에 자원으로 본 읍 포교 노판용에게 잡혀 수원에 갇혔더니, 5월 23일에 위주 치명하니 나이는 51세요. 증인은 김대인이니 죽다. 수원 동청이 지 시몬, 치명자의 아들이라.(*치명사적 1-48)
(다)-② : 홍원여 갸오로
본래 수원 양간 살더니, 신미년 3월에 경포에게 잡혀 이 아래 있는 조(曺)명오와 한가지로 우변에와 한가지로 치명하니, 나이는 23세요 때는 그해 4월이러라.(*치명사적2-133)
(다)-③-ⓐ : 曺명오
본래 수원 양간 살더니, 이 위 홍 갸오로보다 3일 전 기하여 잡혀 홍 갸오로와 한가지로 우변에 와 같이 치명하니 나이는 대개 50세올시다. 증인은 종현 성당에서 식복사하던 홍 벨라도요, 또한 이 위 치명한 갸오로의 6촌 종제올시다.(*치명사적2-134)
(다)-③-ⓑ : 曺명오 베드로
조 베드로 명오는 본데 수원 양간사람으로 열심 수계하다가 군난 전에 3년을ㄹ 냉담하더니, 임신 3월 26일에 경포에게 잡혀 배교하여도 형벌이 심하여 누까지 빠지니 즉시 주모경과 신경을 외워 이르되 “수삼년은 성교를 잘 못하였다” 하고 서울로 간 후에 잡아간 포교에게 물은즉 “4월 25일에 죽었다”하더라. (이 말은 충주 너더리 사는 조 요한에게 들었노라.)(*치명사적6-61)
(다)-③-ⓒ : 曺명오 베드로
수원 양간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수원 돌모루에 거주하는 침치공에게 끌려 천주교를 배우고 그의 집에서 세례명을 짓고 영세함. 안주교(다블뤼 주교)에게 두 차례 고해성사를 봄(*좌포청등록 1871.3.28)
(다)-④ : 림 베드로
림 베드로는 본디 수원 용수말 사람으로 양지 은다라니 살더니, 수원 포교에게 정 안드레아와 림 요한과 림 안또니오와 이중화와 합 열두 사람이 교하여 죽었으며 이 열두 사람의 성, 본명은 대개 알 듯 하기는 석바랑이 정 회장과 검은정이 림 회장 두 사람이 아나이다. 증인은 림 베드로의 자부 양지 은이 사는 림 데레사외다.(*치명사적1-88)
(다)-⑤ : 권 요한
서울, 권 요한, 동(童), 본데 수원 생골(샘골?)사는 권양수의 아들로 배론 학당에서 공부하여 4품받고 병인년 풍파에 수원 건이로 와서 선생하다가 신미년 2월에 경포에게 잡혀 치명하니, 연이 35세올시다. 증인은 김 마리아(*치명사적2-129, *치명일기 270번)
(다)-⑥ : 홍기현(洪基賢, 베드로)
수원 양간에서 태어나 살았고 수원 돌모루에 거주하는 김치공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장주교(베르뇌주교)에게 세례명을 받고 영세함.(*좌포청등록 1871.3.28)
이상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병인박해와 관련된 증언자료 내지 관가기록을 보면 기해박해로 양간 공소회장 정화경 안드레아가 순교한 후에도, 양간 지역에는 조명오, 홍기현 등 몇 명의 신자들이 남아서 때로 다블뤼 주교나 베르뇌 주교의 공소 방문을 통해 성사를 받았을 가능성이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성사를 받았던 장소가 양간이었는지, 아니면 이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해준 김치공이 살던 돌모루(*현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원래 양간 출신으로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던 지다두(*안중으로 이주), 림 베드로(*양지 응다라니로 이주), 권 요한(*배론 학당으로 유학감) 등의 예를 통하여 추측해보건대, 기해박해 후 양간에 살던 다수의 신자들이 타지로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따라서 양간 공소가 기해박해 후에도 계속 잔존하여 공소의 구실을 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약 10년에 걸친 병인박해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개항(1876년)을 전후하여 해외로 피신했던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경기도 각지를 순방하면서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양간 지역에도 ‘느지지’마을에 다시 공소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보존된 1883년 5월부터 1884년 4월까지 경기도 지방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집전한 결과를 기록한 뮈텔 신부의 교세통계표에는 수원 고을에 속한 세 곳의 공소명이 불어로 ‘Ken-eui'(건의), ’Neu-tji-tji'(느지지), ‘Katteung-i'(갓등이)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느지지‘는 바로 당시 행정구역상 수원유수부 양간면에 속했던 ’만촌(晩村)‘을 가리키는데 오늘날의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 속한 작은 동네이다. 그런데 수원 고을에서 개항 이후 선교사에 의해 처음으로 성사가 집행된 위 세 곳은 이미 박해시대 때부터 형성된 오래된 구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박해시대의 양간 공소가 느지지(晩村) 동네에 있었을 가능성도 추정되지만, 한편으로 박해로 인하여 새롭게 옮겨진 교우들의 거점일 수도 있으므로 속단하기는 곤란하다. 아무튼 당시 이곳 느지지 공소에 모인 교우는 모두 47명에 달하며 이중에서 23명이 당년에 방문한 뮈텔 신부에게서 고해성사를 받고 19명이 사규영성체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뮈텔 신부가 그 다음해에도 양간을 방문했는데, 이때는 교우수 40명, 사규고해 31명, 사규영성체 19명으로 기록되어 큰 변동이 없이 공소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뮈텔 신부에 이어 1885년부터 1886년까지 이곳을 방문한 프와넬 신부의 보고에는 교우수가 다소 증가한 60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해 프와넬 신부가 방문했을 때는 교우수가 103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규고해자와 사규영성체자의 수도 각각 57명, 36명으로 증가하였다. 1880년 중반에 이같이 양간 느지지 공소의 교우수와 성사 참가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1886년 한불조약을 기점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행위가 묵인된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박해로 인해 각지로 피신한 신자들이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왔거나 원래 지역에서 냉담하면서 한 동안 신앙을 꺼려했던 신자들이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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