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요당리성지
 




   
  66호(2012년 5월): 우리는 치유가 아니라 구원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가?
  글쓴이 : 요당리성지     날짜 : 12-05-01 13:43     조회 : 947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이하여 저희 성지도 겨울철 비수기의 쓸쓸함을 지나 수많은 순례객들을 맞이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매년 그러하듯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는 시간이 되겠지만 하느님 안에서 오시는 순례객들을 정성껏 맞이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며칠 전 대성당 앞 반송 세 그루가 많이 말라가는 듯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병충해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약을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직접 올라가 확인해보니 병충해에 걸린 것이 아니라 한 나무에 가지가 너무나 많이 달려 나무 스스로가 잔가지를 죽이며 자신을 정리하는 중이었습니다. 다행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잘은 못하지만 전지가위를 들고 이리 저리 죽은 가지와 잔가지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정돈된 나무들을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제 자신도 하느님께서 주신 저의 고귀한 영적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원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이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내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들이 실상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주님 안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며 불필요하게 쥐고만 있었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는 이번 한 달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1. 우리는 치유가 아니라 구원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1-19).

  저는 순례를 오시는 분들에게 자주 위의 복음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는 치유가 아니라 구원을 하느님께 청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위의 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받은 사람은 열사람이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치유과 구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치유는 바로 “외적으로 내 몸이 나은 것을 말하고”, 구원은 “치유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에게 있음을 알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데 위의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신자 분들에게 치유가 아니라 구원을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신앙 안에서 자주 범하는 오류 때문입니다. 즉 많은 분들이 복음에 나오는 열사람의 나병 환자들처럼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쳐지는 우리 기도의 주된 내용은 하느님의 살아계심보다는 오로지 나의 병 치유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이런 모습 속에서 하느님은 단지 나의 치유나 청원을 들어주기 위한 도구로 전락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위험성 때문에 신자 분들에게 뒤이어서 이렇게 여쭈어 봅니다. “나의 간절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나의 병이 낫지 않거나, 아니면 치유를 받았어도 또다시 병에 걸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하느님의 무능을 탓하며 ‘하느님은 없다’ 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치유해 줄 또 다른 전능한 존재를 찾아 나의 발걸음을 옮길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속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내 앞에 주어진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 즉 또다시 나병이 재발하여 나의 삶이 고통 속에 처하게 될지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고 나의 삶을 의탁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아이를 잘 만드는 신부”로 헛소문이 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요즘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 가끔씩 성지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작년에 이런 헛소문을 듣고 어떤 자매님이 아이를 낳지 못해 마음고생하고 있는 아드님과 며느님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소문처럼 아이를 잘 만드는 신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게 오셨기에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를 반드시 가져야만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고 행하십시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아이가 생기지않는 극단의 상황속에서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시어머니 되시는 자매님에게도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아이를 가져야만 된다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내 삶에서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러자 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어머니 되시는 자매님께서는 금새 실망하는 표정을 역력하게 보이셨고, 아드님과 며느님은 처음의 굳은 표정과는 달리 기쁨의 표정을 보이셨습니다.

  한 달 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도 가끔 하느님의 섭리에 깜짝 놀라지만 그분들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는 이유도 바로 아이를 가졌다는 그 사실, 즉 치유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구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잘못 이해하신 분은 아마도 아이를 갖기 위해 즉 치유받기 위해 저를 찾아오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립니다. “저는 구원의 소식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뿐 치유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전에도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분이 찾아왔을 때에도 저는 치유를 이야기하지 않고 구원을 이야기 했습니다. “형제님, 저는 하느님께 형제님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신 형제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즉 그것이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이 올지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의 뜻 안에서 내게 주어진 삶의 발걸음을 걸어갈 수 있기를 청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도를 바치는 제게 안수를 받으시겠습니까?” 

  며칠 전에도 인천교구 모 성당에서 순례를 오셨습니다. 오후 강의가 끝나고 돌아가시는 신자 분들을 배웅하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반갑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제 출신 본당인 안양 중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계셨고, 그래서 더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제가 전에 암에 걸렸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암을 치유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시간은 막을 수 없다고 저도 나이가 들면서 몸의 기력이 많이 쇠약해지다보니 다시 그 암이 재발했습니다. 그런데 요번에는 병원 측에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 저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저 영생의 나라로 초대해 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가지고 계신 하느님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자매님을 구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우리는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치유를 청하고 있습니까?
 

2.  우리 신앙의 완성은 순명과 의탁의 정신에 있다. 상황이 우리 신앙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께서 나의 삶을 좌우하도록 해야 한다.

  가끔 성지에 각 본당의 꾸리아 단원들이 오셔서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분들에게 꼭 들려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성되이 바치고 있는 묵주기도가 무슨 기도인지 아십니까? 바로 무서운 기도입니다.” 그러면 많은 분들이 무서운 기도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바로 무서운 기도라고 말씀드린 것은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모습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미래, 자신의 꿈, 자신의 원의를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이렇듯이 여러분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도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모습처럼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그분께 의탁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기도를 무서운 기도라고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는 이 무서운 기도를 즐겨 바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는 더 큰 은총의 삶에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순명과 의탁의 정신, 이것은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우리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두 가지 높은 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순명과 의탁이라는 이 두가지 높은 덕 안에서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들을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가족 여러분! 교적상 신자가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저희 성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늘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부족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성지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